◎ 소천면 현동1리
ㅇ 현동 : 역사 기록에 의하면 1587년 안동군 소속으로 창촌으로 불리워 오다가 고종당시 전쟁대 식량, 탄약 따위의 군수품을 보급해 주던 병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현면사무소라 하였다한다. 현면사무소의 장이 현동이란 이름을 붙였다하나 정확한 유래는 전하는 바가 없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상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도변을 따라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ㅇ 창마을, 창촌 : 동으로는 막지고개와 서로는 노루재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비교적 평지로 현동천을 끼고 길게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현동의 으뜸되는 마을로 군량미 보관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마을이라 불렀다하며 현재 창고의 흔적은 없으며, 다만 소천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ㅇ 구장터 : 현동의 서쪽에 위치한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오다가 해방후 공설시장으로 산채, 약초, 대추 등 특용작물의 집산지로 비교적 활발한 상경기를 형성하였으나, 농촌인구의 감소등으로 시장기능이 상실되고 현재는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다.
ㅇ 새장터 : 36번 국도를 끼고 있는 면사무소에서 지서까지의 도로변 연접지역으로 1900년경부터 교통의 발달로 구장터의 상권이 도로변으로 옮겨 오면서 새로운 장터가 되었다 한다. 비교적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다.
ㅇ 현들 : 산간지방에서는 비교적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현동천이 흐르고 있어 대부분이 수리안전답이다. 이곳은 자급자족시대 현동 주민들의 곡창지대 역할을 해 왔다.
◎ 소천면 현동2리
ㅇ 시동, 씨라리골 : 현동과 춘양의 중간지점에 우치한 이곳은 예로부터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져서 전쟁시에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저기 억새풀이 무성하여 이곳을 자나는 사람은 누구나 억새풀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씨라린골이란 말이 생겨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씨라리골이 되었다한다. 현재는 길이 나서 차가 다닐 정도가 되었으며 무공해 채소단지로 유명하다.
ㅇ 절골 : 300여년전 이곳에는 수도승 100인이 넘는 절이 있었는데 수도승간의 내분으로 인하여 절이 망하고 터만 남아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세가구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살고 있다.
ㅇ 살피재 : 눈이 올 때 신발인 설피 모양의 재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 이곳은 춘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하며 지금도 길이 남아있다.
ㅇ 칼등 : 시동 입구에서 동으로 200m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파르기가 칼날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꼭대기에는 약수가 난다하여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한다.
ㅇ 곳집마을, 고촌 : 창촌동 북으로 가면 무학봉이 있는데 그 아래로 흐르는 현동천을 끼고 길게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부지등을 개간하여 농지로 이용하고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 지방은 산림이 울창하고 재질도 뛰어나서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커다란 제재소를 지어 이 지방에서 서식하고 잇는 우수한 목재들을 벌목해 갔다. 해방후 김영김시 집안에서 인수하여 30여년간 제재소를 운영하여 이 지방에서는 가장 큰 제재소였으나, 현재는 영업장이 춘양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상여들을 보관하여 왔다하여 곳집마을이라 칭했으며, 현재는 새로이 단장하여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ㅇ 자작정 : 현동 서쪽의 낮은 구름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옛날부터 자작나무가 무성하여 하늘을 덮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약 600여년전 파평윤씨들이 이곳을 개척하면서 지나는 길손들을 위하여 자작나무정자를 지어 쉬어가게 했다고 한다.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여 인근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ㅇ 화장산골 : 화장산으로 가는 첫골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거주민은 없으며 화전민들이 일구어온 농토는 황무지가 되었다.
ㅇ 가래나무골 : 약용으로 사용하는 가래나무가 많아서 인근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현재는 산림조경이 되어 사계절 아름다운 산을 볼수 있다.
ㅇ 임란전적지 : 이곳은 임란 당시 지역 향토의병들이 왜적들과 대현전을 전개하였던 곳으로 장렬하게 순직한 육백의병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봉화군민의 뜻을 모아 임란전적비를 건립하고 매년 추념재를 올리고 있다. 이곳에는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적석봉이 있으며 주변은 소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ㅇ 양지마을 : 노룻재 입구에 위치한 이 마을은 현동천을 따라 촌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햇빛이 가장 먼저 들고, 일조량이 많아 예로부터 가을보리가 풍작을 이루었다하여 양지마을이라 한다. 소재지와 연접하여 춘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마을은 소재지와 더불어 한때에는 상권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고 한다. 50여 가구 이상이 거주하였으나, 모두 떠나고 17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양지마을에는 대각선원이란 암자가 있는데 소재지에서 인접해 있고 스님의 덕망이 높아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다.
ㅇ 대각선원 : 칠곡군 왜관 출신인 "태흔"이라는 분이 가월법해대사를 친견하고 스님을 따라 의성 고운사에 입산 위승도원이라는 불명을 받았으며, 전국을 돌면서 수도하시던 중 현재 소천면 현동2리에 석가모니불상을 안치하고 "칠성암"이라 칭하였고 그후 스님이 열반하시고 스님의 뜻을 받든 현 사찰 주지스님인 혜원스님께서 크게 깨닫는다는 의미로 대각선원이라 이름짓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ㅇ 무학봉 : 유래는 알수없지만 안개가 끼이면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하여 사람들은 미리 조심하였다 한다.
◎ 소천면 현동3리
ㅇ 역전 : 해방후 영동선의 개통으로 철로부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주민들의 대부분이 소규모 자영농으로 전작에 의존하고 있다.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겨울에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철도역은 승객이 많이 줄어 간이역화 되어가고 있다.
ㅇ 막지고개 : 옛날 울진에서 각종 어물을 지고 하루에 100여명식 이 고개를 넘어와서 육지 사람들에게 어물을 팔았다고 하는데, 이곳이 마지막 11번째 고개라하여 막지고개라고 한다. 현재는 교통의 발달로 고개의 이용객이 많지 않으며, 본토인만이 이용하고 있다.
ㅇ 열람, 연남 : 옛날 마을의 남쪽 산기슭에 조그마한 연못이 잇어 농업용수로 사용했다하여 연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ㅇ 암돌, 암호 : 현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곳곳ㅇ 크고 작은 돌이 많아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안고 돌아갔다하여 암돌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하천 부변이 부서진 바윗돌로 이루어졌다하여 암호라 부르기도 한다.
ㅇ 배나드리 : 대율의 동쪽에 위치한 동네로 옛날 남쪽에 고정나루가 있어 분천의 도로와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했다한다.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하여 배나드리란 지명이 생겼다한다. 현재는 도로 교통의 발달로 쓸모가 없어져서 나루터의 흔적조차 찾아 볼수 없으며 한여울 소수력발전소가 생겨 이 지역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ㅇ 불둔지 : 척박한 토질에 낙동강의 토사가 쌓이면서 점차 토질이 비옥해 졌다하며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이곳에 절이 있었다하여 불둔지란 이름이 붙여졌다.
ㅇ 고재 : 배나드리에서 제일 끝쪽에 위치한 곳으로 옛날부터 한가구씩만 거주하였다하며 현재도 한가구만 외롭게 살고 있다. 고재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사람들 입에 구전되었으나 정확한 유래는 전하는 바가 없다.
◎ 소천면 현동4리
ㅇ 한밤이, 대율동 : 100여년전 이곳에는 마을 공동소유으 큰 밤나무가 있었는데 발이 크고 생산량이 많아서 마을 주민 모두가 나누어 먹고도 남았다한다. 사방이 수리산, 병살목, 옥녀봉, 실광터, 절터골로 쌓여 있어 아담하고 소박함이 넘치는 곳이다. 물이 맑아 은어가 품부하였다고 하는데, 하류의 댐건설로 인하여 지금은 은어를 보기 힘든다. 한밤이에는 수령 250년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영험하다하여 정월대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ㅇ 실광터 : 창고 모양의 넓은 터로 현재 고추와 담배가 생산되고 있으며, 아비산 공장이 들어서 있다.
ㅇ 운곡 : 한밤이에서 500m인 이곳은 36번 국도를 따라 형성된 마을로 면소재지에 인접해 있다. 논의 대부분이 경지정리가 되어 있어 질좋은 쌀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규모가 영세하다. 전해오는 예기에 의하면 300여년전 이곳에는 큰 샘이 솟아 석달이상 계속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웃주민들까지도 이 우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ㅇ 우물골 : 큼샘이 솟았던 곳으로 20∼30여년전만해도 샘물이용자가 많았으나, 상수도의 개설로 우물은 막혀버리고 현재는 가뭄이 아주 심할 경우 땅을 파고 물을 쓴다고 한다.
◎ 소천면 고선1리
ㅇ 황평, 황정평 : 조선시대 경복궁 창건시 이곳에 자생하는 황정목을 베어다가 기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황정목의 자생지인 이곳을 황정뜰이라 했다. 황정뜰이란 말이 구전되어 오다가 사람들이 산을 개간하여 정착하면서 평지를 이루었다하여 황평이라 불렀다한다. 현재 이곳에는 폐교된 분교를 재정비하여 봉화군 교육청에서 청소년수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ㅇ 당숲 : 이곳에는 마을을 지키는 500년 묵은 소나무가 있는데, 몇해전 수명을 다했으며 마을의 우지들에 의해 신을 쫒는다는 엄나무를 한그루 심어 높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제를 올리고 있으며 여름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ㅇ 백병, 흰병이 : 31번 국도를 따라 현동에서 12km 떨어진 이곳은 대현으로 놈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설에 명당이라 말하는 빈병형국이라 하여 백병이란 말이 생겼다. 국도를 따라 보이는 고선계곡의 풍경은 세인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ㅇ 강시골, 강서국 : 황평에서 북서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한 산골짜기 마을로 50여년전만해도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으나, 현재는 모두 떠나고 2가구만 약초와 옥수수를 재배하며 살고 있다. 이곳은 개울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하여 강서곡이란 이름이 붙었다하며 겨울에 약초를 캐러온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어죽었다하여 강시골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ㅇ 홍점 : 황평에서 홍제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동해안의 행상들이 소금과 어물을 실어 나를 때 이 길을 지났다하는데 날이 저물면 홍제사에 행상을 풀고 날을 쉬어가면서 전을 펴고 장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규모가 점차 커져서 점포화되었다한다. 여기서 홍제사안의 점포라 하여 홍점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골골이 암자가 많아 수도승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ㅇ 새거리 : 유래는 전하지 않으나 도솔암과 백년암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새거리를 지나야 한다. 옛날 고을원님이 어린 지식과 함께 야유회를 왔다가 자식이 급사하자 애절해하며 애기무덤을 만들어 놓고 내려왔다하는데 그후 이 애기무덤에 손을 대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생겨나 후세인들은 가까이 하기를 꺼리고 있으며, 현재도 이 무덤은 존재하나 잡풀만이 무성하다.
ㅇ 홍제사 : 비룡산 아래 위치한 이 사찰은 신라 제 26대 진평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제30대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하나 정확한 바는 알길이 없다.
◎ 소천면 고선2리
ㅇ 잔대미, 백담 : 조선중엽 이 마을의 중앙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백담이라 불렀다한다.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와전되어서 잣담, 잣대미, 잔대미로 바뀌어 불려진 것 같다. 잔대미는 현동에서 태백족으로 가다보면 황평쪽 물과 구마동 물이 만나는 곳으로서 마을어귀에는 아름드리 큰나무가 군락이 있는데 주민들의 휴식처이며,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다녀간다. 100여년전 이마을을 지나던 도사가 맞은편 산의 묘가 마을의 정기를 빼앗으니 오리 세 마리를 조각하여 마을을 지키라고 했다 한다. 나무로 조각한 오리 세 마리가 묘를 쫒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눈비에 약하다하여 쇠로 세 마리를 조각하여 최고 높은 전봇대위에 올려 놓고 마을을 지키고 있다.
ㅇ 가리내골 : 무학대란 암자가 있으며, 골의 입구는 좁은데 골안은 평지로 양지 바른곳이라 휴양지로 좋은 곳이다.
ㅇ 귀목이 : 잔대미에서 1km 정도 가면 고선주유소가 있으며, 주유소에서 보이는 맞은 편 산이 마치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다하여 귀목이라 한다. 주민들의 주소득원은 고랭지채소이다.
ㅇ 소현 : 소현은 중리를 지나 마방으로 가는 길목이며 이곳은 가우언도 사람들이 경북내륙을 오가는 주요교통로 중의 하나였으며, 여기서 법전, 춘양을 가다보면 고개가 두 개 있는데 법전 소로리쪽을 큰고개 중리쪽 고개를 작은고개라 하였다. 소현은 아마도 강원도에서 이마을 쯤 오면 작은고개가 나타난다하여 붙여진 이름 같으며, 주민은 안, 정, 김, 이 등 각성촌이고 주소득원은 담배, 고추, 고랭지채소 등이다.
ㅇ 중리 : 중리는 잔대미와 소형의 중간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구마동 계곡안에서는 비교적 평지이고 농지가 많으며 농가소득도 상대적으로 높다.
ㅇ 선바위골 : 사람이 서있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바위의 꼭대기에는 몇백년된 춘양목 한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ㅇ 간기 : 간기는 구마동에서 인가가 있는 끝마을로 남쪽의 큰터와 최복단의 새터사이에 있다하여 간기라 불리워진다. 요즘은 큰터, 새터를 통틀어 간기라 한다.
ㅇ 도화동 : 봄이되면 이곳은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아름답기가 무릉도원과 같다고하여 도화동이라 불렀다.
ㅇ 자사골 : 청옥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ㅇ 도암골 : 춘양 각화사로 가는 길이 나있으며, 도암이란 암자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ㅇ 구마동 :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곅고안에는 아홉 마리의 발이 한기둥에 매여 있는 형상을 한 구마일주가 있다고 하는데 이 명당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ㅇ 마방 : 말이 쉬는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ㅇ 죽통골 : 말의 먹이를 담는 죽통모양이 골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ㅇ 노루목 : 마방을 지나 큰터 아래의 중간 지점에서 물을 건너 남쪽을 향해 보면 어미노루와 새끼노루가 고개를 숙여 냇물을 먹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ㅇ 물바위골 : 노루목에서 황평쪽으로 난 샛길의 우등실 입구에서 4KM 정도가면 높이가 50M정도의 바위산이 나오고 그 6부능선 정도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사람 28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동굴안에는 40CM정도의 우물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의 양은 변함이 없으며 부정탄 사람이 가면 물이 말라 버린다는 전설이 있다.
◎ 소천면 임기1리
ㅇ 선당, 서낭당이 : 임기역에서 남동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 이속 마을 어귀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어서 서낭당이라 불렀고, 옛날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강어귀에서 장기를 두고 놀다 갔다는 정자가 있었다하여 선당이라 부르기도 하나 현재는 정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마을 우지들은 성황당을 중심으로 길흉사를 논의하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한다. 광복후 학교가 세워져서 교동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ㅇ 중배리 : 강을 끼고 형성된 산비탈이 있는 곳으로 예전에 이곳을 지나던 중이 강에 빨려 들었다하여 그 이후로 중배리로 불리웠으며, 현재도 이곳은 물이 깊고 위험하다.
ㅇ 골마을 : 선당의 남족에 있는 마을로 제비산의 골진 곳에 집들이 밀집하여 산다하여 골마을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에는 400여년된 고목이 있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ㅇ 담다리, 담월, 담호 : 골마을 남서쪽 1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데 임진왜란 당시 설군행원 여상정 진사가 이곳에 피난와서 정착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한시를 많이 지었다 한다. 어느날 여상정이 뜰을 거닐며 담월이란 한시를 노래했는데 그내용이 다음과 같다. 마을앞 낙동강물에 달빛이 맑게 비추고 뒤의 제비산이 아름답게 비추임에 너무나 아름다운 동네라하여 동네 이름을 담월이라 했다.
◎ 소천면 임기2리
ㅇ 산상 : 숲터에서 북으로 5km 지점인 이곳은 산위의 평지에 분지형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밀양 손씨 5대가 100여년간 화전을 하면서 살다가 이주하였고 현재는 안식교인 4가구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마을의 중앙에 연못이 있어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연못에는 잉어가 많다하나 영물이라 하여 잡아먹기를 꺼리고 있다.
ㅇ 숲터, 임기 : 임기역을 둘러싸고 잇는 마을로 주위의 산에 작은 숲이 우거져 있다하여 소림이라 하였으며, 소림에서 북쪽으로 송림이 우거진 곳을 대림이하 하여 나누어 불렀으나, 근래에는 구별없이 임기, 숲터라 부른다. 소천면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자연부락이며 가뭄시에는 식수의 공급이 어려워 곤란을 겪고 있는데 20여년 전만해도 이곳 유지들은 장군봉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내며 비를 기다렸다 한다.
원두골 : 숲터에서 북으로 2km지점인 이곳은 임란당시 고을 원님이 이곳에서 난을 피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골 입구에는 의성김시의 오랜 재사가 있다.
재궁골 : 골 일대의 지주였던 이씨문중의 재궁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도 재궁과 정자가 현존하나 돌보는 후손이 없어 멸실 위기에 있다. 이곳 유지들이 새긴 것으로 보이는 "약간대"란 바위글이 현종하고 있다.
◎ 소천면 임기3리
ㅇ 감전 : 거내 북쪽 낙동강 상류 강가에 자립잡고 있는 산촌으로 남동쪽으로 향하여 있으며 100여년전 마을 주민들이 감나무를 심었는데 단감이 많이 생산되어 이웃마을 주민과 나누어 먹었다하여 감전이라 한다.
ㅇ 죽미 : 거내에서 강건너 남쪽으로 300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죽미산 기슭에 자립잡고 있어 가을 경치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앞 강가에는 민물고기가 많아 났시터가 되고 있다. 대나무숲이 아름다워 죽미라 한다.
ㅇ 거내 : 약 300여년전에 구마동의 물이 불어 이곳의 낙동강질가 범람하여 모래가 샇여 남동향으로 형성된 곳이다. 선조들은 모래밭을 개간하여 비옥하게 하였으며 현재는 담배농사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큰강(낙동강)이 흐른다하여 거내라고 불리워진다.
ㅇ 갓바위 : 마을앞 강안에 탕건모양의 바위가 서 있어 갓바위라 하는데, 이곳은 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물이 깊으나 잔잔하며 모래밭이 넓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ㅇ 음내 : 거내에서 남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북서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앞 강물이 흐르고 지역의 생김새가 여자의 국부와 같다하여 음내라 한다. 100여년전 의성 김시가 터를 잡고 이곳을 개척하였다하나 련재는 모두 더나고 의성김시를 비롯하여 5호의 각성이 거주하고 있다.
ㅇ 들띠, 들동이 : 거내에서 남으로 2km 지점에 위치한 산촌마을오 옛날 어떤 장수가 큰돌을 들어서 마을 방어막으로 사용하였다하여 들동이, 들띠라 한다. 들띠마을을 통하여 1951년 개통된 영암선(영주~철암)이 지나는데, 영암선 건설 공사중 순직한 사람이 있어 비문을 세우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현재 영암선은 영동선(영주~강릉)으로 연장되었다.
◎ 소천면 두음리
ㅇ 군매리 : 두음리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움푹 들어간 구릉지에 자립잡고 있어 군매로라 하였으며, 망르이 서향이어서 음지매로하고도 한다. 마을 강변에는 갈매기무리가 와서 놀곤하였는데,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었다하며 이를 길조라 여긴 영천이씨 집안에서는 노호라는 정자를 지어 갈매기를 돌보았다고 한다. 영천이씨집안의 최고 우두머리는 갈매기와 이아기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다. 일제시대때 정자가 철거되고 농토로 개간되었다.
ㅇ 뱃가 : 마을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나루터가 있엇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우배지였던 조개섬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ㅇ 조개섬 : 조개 모양의 작은 섬으로 조선시대 유배지 역할을 하여 옥터라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개간하여 과수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ㅇ 호마니 : 군매리에서 1km 지점에 위치한 이마을은 110여년전까지만해도 논에 물을 대기위해 봇도랑에 홈을 파 수로시설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홈안의 마을이 세월이 지나면서 호마니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현재는 콘크리트 수로로 개수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행인들에게 숨터를 제공해주고 있어 정자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임야에는 화전민이 산전을 개간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40년생 낙엽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ㅇ 부채골 : 부채모양의 골이라하여 뭍여진 이름이며, 골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이곳에는 500년된 추자나무와 고목이 많이 자생한다.
ㅇ 물방아골 : 물방아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으로 행인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ㅇ 새병리, 새배리 : 호마니에서 5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8m가량의 벼랑위에 망르이 형성되어 있다하여 새병리라 부른다. 과거 화전민에 의해 개척되었다하며 1950년대 치안 벌체 실시후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교통로가 생겼으며 현재 농촌에 뜻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부농의 꿈을 키우며 이곳을 개척하고 있다.
ㅇ 도시내, 도시천 : 듬골을 따라 4km 가량 가다보면 계곡을 끼고 양쪽으로 조금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계곡주위의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무릉도원이 있어 여기서 신선들이 놀았다하여 무릉도원의 도자를 따서 도시내라 일컽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10연녀전만 하더라도 50여가구가 살았으나 대부분 도시로 이주하고 현재는 맑은 물등으로 안식교인들이 집단이주하여 무공해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지리적으로 듬골 중앙에 취히하고 있으며 한때 주민들이 대거주할 당시 설립된 임기국민학교 두음분교가 있으나 이농현상으로 모두 떠나고 전교생이 8명 이내로 폐교 직전에 있다.
ㅇ 등골, 덕골, 영저 : 본래 안동부 재산현에 딸린 소천부곡의 지역으로 둔음티 아래의 골로 이름이 다양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등골로 알려져 있다. 골의 모양이 사람의 갈비뼈와 같다하여 등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본토인은 거의 살지 않으며, 타지역에서 들어온 안식교인들에 의해 마을이 변모하고 있어 토속미를 잃어가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사람의 갈비벼처럼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이 골로 이루어져 있어 길은 험하나, 임산물이 풍부하여 산나물과 약초 채취가 성행하고 있다.
◎ 소천면 서천리
ㅇ 갯마을 : 서천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인하여 개펄이 생긴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갯마을이라 불렀다. 마을 어귀에는 신선바위는 지성을 드리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하여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고자 할 때는 부부가 함께 왼손으로 바위위에 세계의 조약돌을 던져 올려야 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백목골 : 잣나무가 빽빽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낙동강과 조화를 이루어 경치가 아름답다.
두수골 : 갯마을에서 북동으로 2km 떨어진 곳으로 말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말터라고도 한다.
오미골 : 오동나무가 많은 동네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오산이라 하기도 한다. 이골에서 밀양박씨 10대가 살았다고 하며 현재도 선조들의 묘터가 있어 후손들이 찾는다고 한다.
미골 : 임자없는 묘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이곳에는 잡풀만이 무성하다.
조까막골 : 까마귀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ㅇ 한골, 대곡 : 서천에서 남동으로 2km 거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골짜기가 넓고 크다하여 한골이라 했으며, 임진왜란때 안동권씨가 난을 피하여 이골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ㅇ 개내, 가천 : 한골 동족으로 2km 떨어진 냇가의 산기슭에 위치한 남향마을로 산골 깊은 곳에 항상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하여 개내 혹은 가천이라 부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채굴을 시작한 금호광업소가 있어 아연, 납을 채취하고 있으며 향후 50여년간 캘수 있는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장군봉 : 봉우리보양이 장군처럼 웅장하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이 영험하다하여 기우제를 비롯하여 각종 제사를 올렸다한다. 식수난이 심각한 인른 숲터부락 사람들이 봉우리에 개를 죽여 놓고 비를 내려 달라고 빌기도 하였다.
절골 :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절이 있었다하나,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며, 작은 암자가 있어 간간이 수도승들이 찾는다 한다.
◎ 소천면 남회룡리
ㅇ 솔안, 소란 : 옥방에서 영양 수비 방면으로 내를 따라 4km 거슬러 올라가면 남회룡의 중심마을이 나타난다. 평지인 동네 안에는 질이 뛰어난 소나무 숲이 공원을 이루고 있어 옛부터 솔숲이 있는 동네라하여 솔안이라 불러왔다. 일월산이 뻗어내린 산자락이 그리 험하지 않게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네앞을 흘러내리는 회룡천은 한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삼복더위에도 서늘한 공기가 감돌아 피서지로 좋다. 고냉성 기후를 이용한 고랭지 채소 및 약용작물 재배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도로 확포장과 맞물려 관고아지로 정망이 밝다.
ㅇ 오소 : 남회룡 서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길목에는 아름드리 춘양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며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때는 동네가 형성되어 사람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거주자가 없고 다만 인근 부락에서 농사를 지으로 온다. 인근 산에는 산송이가 많이 채취되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약초 및 산나물의 생산도 많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용소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용강골 : 용소에서 나온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이 골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며, 용을 본 사람은 크게 성공하였다 하나 정확한 근거가 없다.
ㅇ 마당목 : 동네의 생김이 말의 목같이 골이 깊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남회룡에서 두음골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개내골 : 마당목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개내산 입구의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개내사란 절이 있었다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골안에 신기한 복숭아 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열매의 크기가 됫박만하고 탐스럽게 열려 있다고 한다. 열매를 탐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딱딱하여 아무도 맛을 본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ㅇ 사전 : 남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대부분이 모래밭이라하여 부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객토를 하여 토질이 개선되었으며, 행정구역상 낙동강 상류인 회룡천을 경계로 봉화.영양.울진 3개군으로 나눈다. 고랭지 채소 재배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이곳 주민들은 수려한 자연경관의 영향을 받아 인심이 좋다. 10여년전만해도 주민 10여 가구가 거주하였으나, 자녀의 교육문제와 문화혜택의 부재로 젊은이들이 대부분 떠나고 현재는 10여가구의 각성이 거주하고 있다. 남회룡의 중앙부에 위치한 이곳에는 남회룡국민학교가 있었다.
◎ 소천면 분천1리
ㅇ 황목, 숲곡, 수안 : 조선조 단종때 4절신 충곡공 김문기의 109대손인 김세진이 병자호란을 당하여 경기도 양주로부터 이사해 왔을 때 미개척지로 숲에 쌓여 있는 이곳을 개척하고 숲곡이라 이름하였다.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공기가 좋아 휴양지로 좋으며, 현재 이곳 주민들은 고추, 담배를 재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음달마을 : 햇볓이 들지않아 음달마을이라 했으며, 현재 이곳에는 4가구의 각성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는 큰 손바닥 모양이 찍혀있는 바위가 있는데 마을주민들은 장수손바위라 부르며 영험하게 생각하고 있다.
ㅇ 풍애 : 200여년전 야성송씨와 영천이씨 집안에서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오는데, 산세가 빼어나 절경을 이루었으며 개척 당시 풍년이 들어 먹을 것이 풍성하여 이웃가느이 인심도 후하여 마을 이름을 풍애라 하였다고 한다. 풍애의 뜻을 풀이하면 물가에 위치한 풍성한 마을이란 뜻이 들어 있다. 이 곳에는 200년 묵은 소나무 한그루로 지은 목조건물이 있는데, 야성송씨 집안의 촌장이 도포자락에 넣어 왔다는 100kg정도의 돌이 마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전하는 이아기에 의하면 야성송씨 집안과 영천이씨 집안에서 돌을 서로 던지며 힘자랑을 벌이기도 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10여 가구만 살고 있다.
◎ 소천면 분천2리
ㅇ 능호, 역전마을 : 마을의 역사는 깊지 않으며 1956. 12. 31 영동선 철도 개통후 내륙지방과 동해안 울진을 연결하는 매개역활을 하는 지역으로 철도와 육로를 이어주는 연계지점으로 발달하게 되어 역을 중심으로 상업지역을 형성하였으나, 현재는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자동차 보유율이 높아져 정체되고 있는 부락이다. 철도 개통이후에는 역전마을로 불리우고 있으나, 예전에는 마을 주위를 낙동강이 감돌아 호수 같다고 하여 능호라고 불리었으며,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며 타지에서 이주하여 온 각성이 거주하고 있다.
약수터 : 역뒤로 가파른 절벽 아래 약수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의 약수는 깊은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몸에 좋다고 소문난 곳으로, 약 20여년전 이곳 약수터 옆에 암자를 지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수도도량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약수암이라고 한다.
ㅇ 가호 : 능호에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아름다운 호수 같다고 하여 가호라고 불리고 있으며, 망르이 위치한 산등성이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험준한 계곡을 갓 빠져나온 낙동강이 옷매무새를 고치듯이 고요하게 흘러내려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된다.
ㅇ 비동 : 능호에서 6km 떨어진 분지로서 옛날 화전민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하며, 땅이 기금지가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숲이 우거지고 산과 산 사이로는 낙동강이 굽어져 흐르는 지역이며 대추, 고추, 약초등이 주로 생산된다.
ㅇ 원곡 : 광비에서 5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8호가 거주하며 대추가 많이 생산된다. 마을 어귀에는 400년 이상된 소나무가 있다.
◎ 소천면 분천3리
ㅇ 자마리, 자만리 : 지형이 옛날 중국의 뛰어난 장수가 타던 용마의 형국이라하여 자마리라 부른다는 설이 있으며, 산세가 수려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유달리 아름답다하여 자만리라 불리워지고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ㅇ 광비 : 자마리에서 1.5km 지점인 이곳은 하천을 사잉에 두고 울진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복수박과 토종꿀을 생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회학산(913m) : 이 산에서 큰 성지골, 작은 성지골이 시작되었고, 중턱쯤에 지금도 왕릉같은 모양의 백장군의 쿄가 있으며 자손이 없는 듯 돌보는 이가 없고, 고아비 주민들은 힘센 사람을 백장군에게 비유하며, 회학산에서는 맑은날 동해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 소천면 분천4리
ㅇ 멧재, 매현동 : 분천에서 서쪽으로 4km쯤 떨어진 분재는 울진.영주간의 교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큰 재이다. 산의 옛음이 뫼가 변해서 멧재라 하였다는 설과 옛날 한쌍의 매가 이곳으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번식시겼는데, 그 수가 헤아릴수 없었다하여 맷재라 불린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ㅇ 평지, 부내 : 여우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 갈라져 낙동강으로 흐른다하여 부내라 부르고 있으며 하천 양옆으로 토사가 쌓여 평평한 마을과 기름진 땅을 이루었다하여 평지라 한다. 분천4리의 중심지로서 분천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경주이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으며 혅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ㅇ 서자골 : 옛날 서쪽의 척박한 땅에 살던 사람들이 비옥한 당을 찾아 유랑하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유랑객중 한명이 이곳을 우리가 개척하여 살 땅이니 서자고 한데서 서자골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약 550년된 육송이 있어 군보호림으로 보호하고 있다.
삼밭골 : 산삼이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도 가을철이면 산삼을 캐러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삼밭골안에는 100평 정도의 절터가 있는데, 빈대가 많아 사람이 기거할 수 없어 오리지 않아 절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절의 흔적을 알수 있는 돌담들이 있는데, 뒤져보면 빈대의 껍질이 발견된다고 한다.
마재골 : 서자골에서 장수가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기어다니는등 보통아이가 아니었다. 옛날 평민 집안에서 장수가 태어나면 앞으로 나라를 지배할 역적이 된다하여 그 신동의 부모가 애통해하며 평지마을로와 아이를 죽었는데 아이의 영혼은 흰말이 되어 등천하여 스스로 바위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어 마재골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장수바위 밑에는 갑옷이 한벌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ㅇ 여우천 : 분천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의 골짜기로 여름철이 되면 냇물 흐르는 것이 소낙비 내리는 것처럼 시원하다 하여 여우천이라 한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천혜의 땅이라 한다.
구수곡 : 골의 모양이 여우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석이동 : 산에 돌이 많았으며, 석이버섯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하여 석이동이라 불린다.
ㅇ 도호 : 고대 부족국가시대 여러 소왕국이 각지에서 형성되었을 무렵 이곳에도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작은 왕국을 건립하였다 한다. 풍수지리설로 볼 때 명당자리로 구전되는 바, 1.석재 2.도호. 3하회로 꼽을 정도로 낙동강 상류지방의 둘재명당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강과 숲이 우거져 있어서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좋은 장소이며 학생들의 야외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이곳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도호에 댐을 막아 소수력발전소가 있다.
◎ 소천면 분천5리
ㅇ 옥방, 금정골 : 1913년 1월 15일 일본인 아부오랑조와 한국인 김상순이란 사람이 문암계곡에서 옥석을 발견한 뒤부터 옥이 많은 곳이라 하여 옥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중석광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정착하여 많을 때는 1,200세대가 거주아였다고 한다. 1981년 중석광산이 폐광된 후 모두 떠나고 현재는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대구촌골 : 일제시대 이곳에 대구촌이라는 요리집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샘물이 약수라서 옻이 오른 사람이 씻으면 금방 옻이 없어진다고 한다.
심심이골 : 옥천암에서 1500m 정도 가면 심심이가 2개 있는데 적은 심심이는 옥방휴게소 우측 100m지점에 있는 골이며 큰 심심이는 옥천암 근처에 있는 골이다. 설에 의하면 골이 깊어서 끝까지 가려면 심심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